실학자, 개성상인, 인삼 유통 등을 통해 알아본 조선후기의 물류(하)
작성자 : LoTIS 2015.09.03 게시
그림1.
인삼유통을 통해 바라본 물류
인삼은 18세기 이전까지 자연상태에서 채취한 자연삼의 형태로 거래되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전국 239개 군현 가운데 112개 고을에서 인삼이 생산되거나 공물로써 진상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대부분 백두대간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자연삼은 평안도 강계가 최대 산지로 사상(私商)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매입해 중국, 일본으로 수출했다. 그러나 너무 무절제하게 수출된 나머지 정작 조선에서는 인삼의 품귀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인삼의 품귀현상은 인삼을 재배하는 생산방식을 출현시켰다. 자생하는 인삼을 캐는 방식은 생산량의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종(種)의 멸종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사이에 조선의 인삼생산은 인삼 종자를 밭에 심어 기르는 가삼(家蔘)의 형태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인삼은 최소 4~5년은 길러야 상품화가 가능했으므로 오랜 기간에 걸쳐 자본과 기술, 노동력의 투입이 필수적이었다. 인삼을 구매할 때 “6년근”이 비싼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자연상태의 생삼은 우리가 흔히 “수삼”이라 부르는 것인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분함량이 많아 오래 보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자연건조시킨 건삼(乾蔘)혹은 백삼(白蔘)의 형태로 가공해 왕실에 진상하거나 수출했다.
그림2.
인삼은 조선의 주요 교역품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인삼무역에만 쓰이는 고액 화폐를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조선 사신과 동행하는 상인들의 인삼을 매입하지 못하면 그 해 장사를 망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아시아 각국은 인삼매입에 적극적이었다. 수출되는 인삼은 보통 1근 단위로 거래되었는데, 자연삼 형태로 거래되기도 했지만 자연삼을 건조시킨 건삼(乾蔘) 형태로도 거래되었다. 그러나 건삼은 시간이 지나면 부서지는 약점이 있었다. 의주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사행길 도중 인삼이 변질할 우려가 컸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인삼을 끓여서 말리는 방법을 쓰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쪄서 말리는 방법으로 전환되었다. 홍삼(紅蔘)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포(蒸包)법을 누가, 언제 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인삼을 증포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크게 2가지였다. 첫 번째로 인삼이 변질하는 것을 저지하고 두 번째로 인삼의 효능을 극대화한 것이었다. 홍삼은 백삼보다 더욱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변질되는 경우가 줄어드니 당연히 수익도 증대되었다. 인삼증포법 개발은 상품의 손실을 줄이기 위한 물류적 관점에서 개발된 가공방법이었지만 조선의 무역이익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홍삼의 공식 무역량은 1797년(정조 21) 120근을 시작으로 1841년(헌종 7)에는 2만 근에 이르렀다. 불과 50년도 안되어 약 166배의 증가세를 보인 것이다. 홍삼은 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에서도 각광받는 상품이었다. 1880년(고종 17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의 기록에 의하면 청 조주(潮州)와 태국출신 상인 20여 명이 충청도 비인현에 표류했다. 조정에서는 그들이 어떤 이유로 조선까지 오게 되었는지 홍제원에서 심문했다. 그들은 교역을 위해 태국에서부터 중국 각지의 항구를 거쳐 요동까지 왔는데 다시 태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산동반도 인근에서 조난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그들이 소지했던 물목 중에 홍삼 아홉 궤짝(?)이 있었는데 그들은 본선을 버리고 구명선으로 대피하는 다급한 와중에도 홍삼만큼은 꼭 챙겨서 대피했을 정도로 홍삼이 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홍삼의 명성이 동남아시아에서도 자자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상인의 공급사슬관리
개성이 의주나 부산처럼 외국과 인접하지 않았음에도 상업도시로 유명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개성은 고려왕조의 수도였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이 수도가 되었을 때, 조선왕조는 개성 주민들을 한양으로 이주시켰는데, 전 왕조에 대한 충성으로 여기에 따르지 않고 개성에 남은 주민들이 많았다. 개성에 잔류한 주민은 불충한 자로 간주되어 토지에 대한 혜택이 부여되지 않았다. 따라서 농업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진 개성 주민들은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개성 주민들은 개성을 떠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면포, 농기구 같은 생필품 유통에 주로 종사했다. 개성상인의 전국적 활동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송방(松房)”이라는 조직으로 더욱 체계화되었다. 전국 각지에 위치한 송방에서는 주재원을 통해 상품을 판매/조달하면서 자본력, 조직력을 바탕으로 도매업을 전개했다. 제지업자들과의 선도거래를 통해 종이 유통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제주에서 생산되는 갓의 원료인 양태가 해남, 강진에 상륙하자마자 송방에서 전량 매입하기도 했다. 한양 육의전의 시전상인이 금난전권(禁難廛權)이라는 봉건적 특권을 통해 이익을 얻은 것과는 달리 개성상인은 전국적 유통망과 정보력을 이용한 경쟁을 통해 상품유통을 장악했던 것이다. 개성상인은 인삼의 유통 또한 장악했다. 중국으로 수출하는 홍삼이 개성에서 주로 생산됨에 따라 인삼유통에 대한 권한 역시 개성부에서 보유하고 있었는데, 개성부는 인삼유통의 상당부분을 개성상인에게 위임했다. 개성상인은 송방을 통해 강계 등지에서 생산되는 인삼을 수매한 뒤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했다. 당시 중국의 화폐는 은본위제로 운영되었는데, 은 생산지로 유명한 일본에서 무역대금을 은으로 지급하면서 자연히 은화를 사용하는 중국과의 무역이 용이하게 되었다. 무역을 통해 얻은 중국산 물품을 다시 조선과 일본으로 되팔면서 개성상인은 막대한 무역이익을 취했다. 1740년(영조 16년)경 강계산 자연삼은 상등품 1근당 은 100냥, 중등품은 80냥, 하등품 은 60냥이었지만 1752년(영조 28년)에 이르러서는 상등품 1근에 은 200냥, 중등품 은 160냥, 하등품 은 100냥으로 12년 사이에 가격이 2배로 치솟았다. 이러한 환경은 개성상인들의 자본축적을 촉진시켰다. 이 시기 연행사(燕行使)를 통해 중국에서 판매된 인삼의 가격은 은 350냥에서 700냥 사이에 거래되었는데, 조선에서 거래되는 가격의 최대 7배에 이르는 가격으로 매각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인삼재배가 상업화되자 개성상인들은 자신들의 상업 본거지인 개성 인근 지역에 인삼재배를 활성화시켰다. 인삼수매를 위해 각지를 왕래하고 운송하는 것보다 개성 인근에서 기업형 재배를 통한 물류비 절감과 대량생산, 그리고 의사결정의 신속함을 추구했던 것이다. 또한 개성은 한양과 가깝고 고려왕조의 수도로 기본적인 도시 인프라가 갖추어진 곳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클러스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림3.
상기했듯이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기 위해서는 증포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홍삼제조를 담당하는 증포소는 정부의 소관이었다. 개인이 사사로이 증포할 수 없었다. 증포소는 정부가 홍삼무역을 공인한 정조 21년(1797) 한양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개성으로 옮겨졌지만 18세기 중반까지 한양과 개성을 오가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가장 큰 사상(私商)세력이었던 개성상인과 경강상인이 서로 유리한 위치에 증포소를 유치하기 위해 줄다리기를 하면서 증포소 역시 한양과 개성을 옮겨다닌 것이다. 증포소의 위치는 곧 물류비와 직결되었다. 원료산지(인삼)와 이를 가공하는 공장(증포소)이 멀수록 원료운송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실제 생활에 응용가능한 학문, 즉 실사구시(實事求是),이용후생(利用厚生),경세치용(經世致用)을 모토로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들의 고민은 백성이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이었다. 실학자들은 그 수단 중 하나로 운송수단개선과 물류인프라 확충을 통한 물류혁신을 꼽았다. 인삼의 변질에 대한 고민은 쪄서 말리는 증포라는 획기적인 보존방법을 창조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개성상인의 사례에서는 송방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한 상품의 적시조달과 지역 간 유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홍삼 SCM” 을 통해 원료산지와 가공공장, 본사를 엮는 부가가치사슬을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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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단어 | 조선시대인삼물류 |
| 자료출처 | 실학자, 개성상인, 인삼 유통 등을 통해 알아본 조선후기의 물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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